음대넓얕

유행은 돌고 돈다. 조선의 대중음악이었던 판소리

판소리 역사 대탐험🛸

by Jinny

유행은 돌고 돈다고 하지요. 트로트에 이어 국악이 조선 판스타, 풍류대장 등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주목 받고 있습니다. 국악의 여러 장르 중에서도 판소리의 활약이 특히 돋보이는데요, 특히 1600만뷰를 기록한 범~ 내려 온~다를 부른 이날치라는 밴드는 대중음악의 반열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통 판소리에 드럼, 베이스 등의 현대적 그루브가 인상적인데요, 다채로운 화성이 소리꾼의 감정선을 뒷받침하여, 곡의 내용과 상황, 그리고 감정이 더 쉽게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 문득 궁금해집니다. 옛 조선에서 판소리가 공연되던 모습은 어땠을까요? 드럼이나 베이스 없이 소리북으로만 반주했던 전통 판소리도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을까요? 애초에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오늘 아티클에서 판소리의 역사를 탐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1. 판소리란?
  2. 판소리의 기원
  3. 판소리는 어디에서 공연되었을까?
  4. 광대의 유닛(?!)활동
  5. 대중음악이 된 판소리
  6. 판소리의 쇠락
  7. 오늘날의 광대

1. 판소리란?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북 반주에 맞추어 긴 이야기를 몸짓과 구연을 섞어가며 노래하는 한국의 전통음악의 하나입니다. 판+소리 즉, 많은 청중이 모인 놀이판에서 하는 소리(노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구전심수로 전해 내려오던 민간의 짧은 이야기가 스승에서 제자, 다시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도제교육을 거쳐 방대한 서사와 세부 묘사를 담은 독특한 종합예술 장르가 되었는데요. 2003년에 역사적, 미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기도 하였어요.

좌: 2006년 세종문화회관 <문화의 밤> 행사에서 열린 명창 안숙선의 ‘흥부가’ (출처:위키백과)
우: 작자 미상의 명창 모흥갑 판소리도 (서울대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 명창 모흥갑의 공연을 그린 풍속화를 보니, 현재의 판소리 연행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긴 세월 동안 음악 내적으로는 변화와 발전을 이루며, 큰 틀에서는 원형을 지키고 명맥을 이어온 소리꾼들이 정말 대단하네요.

2. 판소리의 기원

판소리의 기원설은 다양한데 호남 지역의 ‘창우집단’에서 발생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창우(倡優)천민 출신의 민간 전문 예능인을 일컫습니다. 보통 혼자 공연하기보다는 기악, 소리, 기예, 춤 등 각 분야를 담당하는 창우들끼리 ‘창우집단’을 이루어 종합적인 볼거리를 제공하였습니다.

영화 왕의 남자(2005) 중 창우들의 재담극 (출처:경향신문)
연산군 앞에서 재담극을 하는 창우집단. 이 시기 창우집단의 레퍼토리 중에 판소리는 아직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우집단에서 소리를 담당하는 사람광대라고 불렀습니다. 광대의 레퍼토리는 마을의 각종 고사에서 부르던 고사소리,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재담, 우리가 잘 아는 그 판소리, 판소리에 앞서 짧게 부르는 노래인 단가가 있는데요, 이 중 판소리는 비교적 늦게 생겨난 장르입니다. 추정하건대, 판소리는 17세기 이후에 호남 지역 창우집단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점차 인기를 얻어 주요 레퍼토리가 되어갔습니다. 판소리의 긴장감 있는 극적 구성과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노래가 그 시절 사람들에게도 매력 포인트였나 봅니다.

광대에 대해 설명하는 짧은 단가 '광대가'

3. 판소리는 어디에서 공연 되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1780년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으리으리한 대가집에서 한바탕 판이 벌어져 양반 양민 할 것 없이 모여들어 구경하는군요! 대가댁의 자제가 과거에 급제하여 열린 잔치(문희연)라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줄을 타고 한쪽에서는 판소리를 하네요.

동도문희연도(1526년 중종) (출처:KBS역사저널 그날)

이 대가댁처럼, 집안에 경사가 일어나면 창우집단을 초빙해 잔치를 여는 것이 관례였다고 하는데요, 집이 가난했던 송만재(宋晩載, 1788~1851)는 아들 지정(指鼎, 1809~1870)이 과거를 보아 진사에 합격하자, 실제 광대놀음을 마련하는 대신, 그 놀음을 읊는 50수의 한시 <관우희觀優戱>를 지었다고 합니다. (짠내폭발) 그런데 후손들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좋았습니다. 창우집단 공연 문화에 대한 중요한 기록이 되었거든요.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 (출처:한국민속대백과사전)

영산회상 끝나자 장구채 놓으니 會相收時息鼓檛
누각의 위아랜 물을 끼얹은 듯 樓頭樓低靜無譁
가랑비에 첨화는 툭툭 봄구름 맑은데 簷花細滴春雲淡
얼씨구나 귀기울여 판소리나 듣자꾸나 側耳將廳本事歌
- 8수, 영산 마지막 장면

금슬의 다사함은 회진기랄까 琴瑟繁華憶會眞
광한루에 수의사또 당도하였네 廣寒樓到繡衣人
도령님 그전 다짐 어기지 않아 情郞不負名佳節
옥에 갇힌 춘향이 살려내었네 鎖裏幽香暗返春
- 9수, 판소리 춘향가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 (출처:한국민속대백과사전)

관우희 외에도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의 『소재집(蘇齋集)』 이나 이이익(李瀷, 1658~1762)의 『성호사설』,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의 <가사 춘향가 이백구 歌詞春香歌二百句>(1754)등의 사료에 광대의 소리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요, 이를 통해 광대의 주된 공연물이 간단한 흉내 내기 정도의 재담극(17세기)에서 판소리 중심(18세기)으로 바뀌었고, 18세기 중엽 영조 무렵에는 이미 춘향가, 배비장전 등 열두 곡 이상의 판소리가 존재하였으며, 양반 사대부들 또한 판소리를 향유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4. 광대의 유닛(?!) 활동

여러 계층에 너나 할 것 없이 인기가 많은 판소리였지만, 판소리 관람이 일상적인 풍경은 아니었습니다. 문화가 융성하려면 먹고 사는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데, 공연을 유치할 경제력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19세기에 이루어진 경제의 발달은 판소리가 융성할만한 토대를 만들어 줍니다.

조선 후기 획기적으로 발전된 농업 기술(이앙법)은 농업 생산량의 축적, 즉 부의 축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정조가 시행한 대동법, 화폐 금본위제 등의 정책으로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였어요. 물류가 증가하고 시장이 활성화되었지요. 저잣거리나 시장에서는 소비자를 유인하기 위한 구경거리로 공연이 행해졌습니다. 이 풍족한 행사 수요에 부응하여 여러 음악 집단들이 공연 활동을 통해 생계를 꾸렸습니다.

거상 임상옥(1779~1855)이 시장에서 사당패 공연으로 구경거리를 만들어 사람을 모은 뒤 돈을 버는 장면 (MBC드라마 상도)

농업으로 부를 이룬 부농, 상업으로 부를 이룬 부상층은 문화계의 새로운 큰 손이 되었습니다. 졸부가 재벌의 소비를 따라 하는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부를 가지게 된 그들은 문화적 수준을 양반들과 같이하는 것으로 출신성분(양인 혹은 중인)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부유층들의 풍류방에서 음악회와 잔치가 이루어졌죠.

상춘야흥(賞春野興)_신윤복 (간송미술관 소장)

특히 판소리를 부르는 광대의 인기는 대단해서, 성공한 광대는 큰돈을 벌었고 상류층과 교류하며 품위있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은 양반, 중인, 부호층들의 비평 대상이 되며 예술성을 인정받았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광대들은 창우집단에서 떨어져나와 독자적인 유닛(?) 활동을 하기도 하였는데요, 심지어 명창 모흥갑과 염계달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명예직을 제수받기도 하였습니다. 천민에게 벼슬이라뇨! 신분제도 뛰어넘는 인기였습니다. 명창 이날치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흥선대원군의 형을 '심청이 공양미 삼백석에 팔리는 대목'으로 울려 큰돈을 받은 일화도 있습니다. (이날치 밴드의 '이날치'는 이 명창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에요!)

5. 대중음악이 된 판소리

1) 격변의 시기, 사라진 신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한국사 격변의 시기였죠. 창우의 살에 와닿는 가장 큰 변화는 신분제의 폐지였습니다. 비록 19세기 경제발전으로 인해 문화계가 경제 논리에 따라 흘러가는 경향이 생겼지만, ‘신분’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지배체제였죠. 신분제 폐지로 인해 창우들이 겪은 두가지 큰 변화는 창우집단의 와해공연 계기 상실이었습니다.

당시 천민들은 일반적으로 부모의 직업을 세습하였습니다. 천민이었던 창우집단의 결속 또한 신분과 혈연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들이 면천되면서 신분의 구속력이 사라진 창우집단이 와해되기 시작합니다. 명창 김창룡도 “노래깨나 부를 줄 알았던 사람은 다 육십 칠십이 넘어 늙어버리고 뒤를 이을 젊은이들은 중도에 그만두는 사람이 대부분, 예전같이 일생을 노래에 맡기겠다는 사람이 없어 섭섭하기 짝이 없다”며 한탄합니다.

신분제의 폐지는 양반들이나 부호층에게도 큰 타격이었겠지요. 그들의 재산이었던 노비가 사라졌으니까요. 대감댁에서 벌어지는 잔치가 크게 줄어들고 1894년에는 과거제도가 폐지되며 상당수의 공연계기가 사라졌습니다. 창우들이 법적 신분 상승에도 불구하고 신분제를 그리워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지요.

2) 극장의 출현, 대중의 탄생

문화계 큰 손 ‘양반’이 사라진 20세기 초, '극장'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창우들의 기회가 됩니다. 극장의 출현은 불특정 다수라는 '대중'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죠. 극장들이 음악가를 공개 모집하면, 공연을 원하는 창우들이 모여듭니다.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으로 건립된, 최초 국립 극장 협률사(1902) (출처:우리문화신문)

창우들 중 소리꾼인 광대가 단연 스타로 떠올랐는데요, 광대의 인기가 어느정도였냐고요? 그들이 받았던 페이(소리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광대는 실력에 따라 1,2,3 등급으로 나뉘었는데요, 1902년 1등급 명창의 소리채가 20원이었으며 이 금액을 3일에 한 번 지급하였고, 초과근무시 수당을 더 준다는 조건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특등 공연 좌석이 1원, 연흥사의 프랑스인 사장 월급이 50원이었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페이를 받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지요?

내한 공연 온 외국 가수들을 떼창으로 혼내준다는 열성적인 코리안 팬덤이 그 효시를 보인 것도 판소리 공연입니다. 출중한 실력과 잘생긴 외모로 유명했던 명창 김창룡의 경우 열성적인 여성 팬들이 많았고, 그의 사생활이 초미의 관심거리였다고 합니다. 사생팬의 효시? 유명한 창부들의 출연 여부는 흥행을 결정하는 관건이 되었고 창부들을 둘러싼 소속 극장들의 경쟁도 심했다고 해요. 성공한 명창 김창환과 송만갑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흥행단을 만들어 지방 순회공연을 하기도 합니다.

극장무대에서 광대들은 창우'집단'의 뒷배 없이 개인이 독립적으로 활동하며 끊임없이 크고 작은 경쟁을 치러냈습니다. 그 중 성공했던 광대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어요. 예술계의 승자독식 구조가 여기서도 보이네요. 😢

6. 판소리의 쇠락

1) 유행의 변화

극장은 전통음악의 극장 공연물로서 레퍼토리를 개발하고 유통하는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유행을 민감하게 쫒는 상업 기관이었죠. 극장이 신파극이나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수용하면서 음악가들의 공연장은 줄어들게 됩니다.

‘극장’ 이후로 등장한 대중음악의 매체는 바로 '음반'이었습니다. 외국에서 들어온 음반사 역시 상업적 콘텐츠로서 전통음악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극장처럼 적극적인 레퍼토리 발굴, 음악인 발굴에 힘쓰지 않고 극장에서 이미 인기와 성공을 입증한 레퍼토리를 위주로 녹음하고 유통하는 데에 공을 들이지요. 그러던 중 점차 인기를 얻고 있던 서양음악어법으로 작곡된 신식창가, 일본어 번안가요, 신민요 등으로 관심을 옮겨갑니다. 음반의 파급력으로 인해 서양식 음악어법을 바탕으로 하는 대중음악이 득세하게 됩니다.

2) 창극의 성행

극장이 생겼던 1910년대, 하나의 판소리 공연에 여러 소리꾼이 배역을 나눠 연기하던 것이 ‘창극’이라는 장르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창극은 여러 소리꾼들이 공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스타를 배출하는 등용문이 되었습니다. 춘향가, 심청가 등 전통적 판소리뿐만 아니라, 새로운 대본에 의한 창작 창극을 제작하는 등 여러 시도를 하였는데요, 이와 같은 노력으로 창극이라는 장르는 광복 이후까지 성행합니다. 그러나 마치 뮤지컬 배우가 된 가수가 단독 콘서트에 소홀하게 되는 것처럼, 창극의 성행은 한편으로 전통 판소리 공연이 쇠퇴하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3) 한국전쟁

한국전쟁을 겪고 난 1960년대에는 판소리 명창 수가 극소수로 줄어듭니다. 많은 소리꾼이 작고하거나 월북하였거든요. 이에 위기의식이 발현된 것인지, 곧 판소리 부흥운동이 일어납니다. 박동진(朴東鎭)이 판소리 다섯마당의 전판 공연을 시도한 것을 계기로, 박초월·김소희·오정숙(吳貞淑)·성우향(成又香)·박초선(朴初仙)이 판소리 전판 공연을 합니다.

1960년대에 판소리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뒤 정광수(丁珖秀)·오정숙(吳貞淑)·박동진·성창순(成昌順)·조상현(趙相賢)·한승호(韓承鎬)·김성권(金成權)·정철호(鄭哲鎬), 김영자(金榮子),정회석(鄭會石) 이 보유자로 인정되어 전승 활동에 주력합니다.

7. 오늘날의 광대

그 이후 교육계에서도 판소리를 ‘전공 성악장르’로 규정하고 매년 전공자들을 배출하였는데요. 그 학생들이 자라나 판소리를 다시 한번 대중음악화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구슬픈 피아노 반주에 애간장이 끊어지는 쑥~대머리~를 부른 박애리, 현란한 피아노 반주에 적벽대전의 긴장감을 담아낸 한승석 등 여러 선생님이 한 세대 앞서서 밭을 일구었고, 이 밭에 이날치, 아이리쉬 밴드 두번째달과 함께 활동하는 김준수,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고영열 등 후학들이 꽃을 피우는 중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함께 돌아본 판소리의 역사 재밌으셨나요? 달콤한 화성이나 화려한 반주 없이도 북 만으로 희로애락을 즐겼던 우리 조상님들은 도대체... (흥의 민족)

음악학자 아도르노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시장과 무관한 음악이 만들어지는 경우는 없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대중음악은 시장에서 상품으로 유통되기 위해 표준화된 음악이라고 설명합니다. 창조적인 개성에서 벗어나 탈개성화된 음악이라며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 국악 밴드들이 다시 인기를 얻는 것을 보면, 요즘 대중들에게는 아티스트의 개성을 존중하고 그 특별함까지 소비하길 원하는 기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종합 예술 판소리. 국악의 여러 장르들 중에서도 동시대 대중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성악 장르인 만큼, 대중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앞으로도 새롭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소리꾼들의 활약을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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