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대넓얕

위대한 음악의 기준은 무엇일까

위대성에 대한 고찰

3년 전|Harrison
목차
  1. 무엇이 위대한 음악일까
  2. 위대성을 탐구하기 위한 지표로서의 음악
  3. 위대한 예술이 되기 위한 조건
  4. 위대성을 품을 시기의 적합성
  5. 명백한 위대성이 존재하는가
  6. 절대적 위대성의 부재와 위대성 통찰의 필요성

1. 무엇이 위대한 음악일까

beethoven

베토벤, 음악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이름은 알고 있을 거예요. 누군가는 베토벤의 음악을 들어본 적 없다고 말하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음악이 베토벤의 작품인지를 몰랐을 뿐, '아! 이게 베토벤 곡이었어?'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할 친숙한 음악이 넘칩니다. 이렇듯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지 어언 20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도 그의 이름과 작품을 알고 있으며, 음악 전공자에게도 베토벤은 성인(聖人)에 비견할 만큼 위대한 작곡가로 추앙받고 있어요.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볼 때 그의 작품이 훌륭하다는 점에는 대중적으로도, 학술적으로도 의심할 여지가 없고, 엄청 훌륭하고 위대한 작곡가임에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한 번 의구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콜럼버스보다 아메리카 대륙에 다녀간 사람들은 많았지만 역사에 기록되지 않아 잊힌 사람들처럼, 베토벤의 음악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역사기록자가 그의 이름을 빼버렸거나, 그의 음악을 보존하고 계승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는 영영 잊혔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베토벤보다도 더욱 훌륭하고 뛰어난 작곡가가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그 수많은 작곡가 중에서 하필 베토벤이 숭배와 찬양의 대상이 되어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을까요, 단순히 그의 작품이 위대하기 때문일까요?

이에 또 다른 의구심이 생깁니다. 위대함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누가 무슨 기준으로 위대함을 결정할까요. 많은 사람이 좋다고 하기 때문에? 하지만 세상엔 베토벤의 음악 말고도 좋은 음악이 정말 많고, 좋음의 기준도 상대입니다. 아니면 보통 사람이 눈치챌 수 없는 숭고하고 심오한 예술혼이 담겨있기 때문일까요? 알아봐 주는 이도 없는 위대성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더욱 말이 되지 않네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대성이란 무엇이며,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위대성의 잣대와 이것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보며, 이를 통해 무엇이 진정한 위대함인지에 대해 고찰해보겠습니다.

2. 위대성을 탐구하기 위한 지표로서의 음악

위대성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하는 가치임에는 분명합니다.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고 느낍니다. 우리는 인물, 능력, 사건 등 온갖 다양한 곳에서 위대성을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예술에서의 위대성역사적 위대성보다 더 오래가고 보편적입니다. 역사에 기록된 위인이나 사건 경우 이미 죽고 사라졌거나 시간이 흘러가 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위대성을 판가름하기 위해선 기록된 글이나 구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예술은 대체로 탄생한 모습이 보존되어 명백하게 그 위대성을 판가름 할 수 있죠.

위대성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기에 앞서 수많은 예술 분야 중에서도 음악을 기준으로 삼아보려 하는데, 그 이유는 (기록이 된 이후의) 음악은 거의 변질 없이 태초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이어져 내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화나 조각, 건축 등의 예술은 제아무리 보존을 잘한다 해도 시간적 한계에 제약을 받아 변질되거나 파손될 수밖에 없지만, 음악은 공연장에서 연주가 되든, 이어폰을 통해 재생되든, 누가 연주를 하든 수단과 방법에 상관없이 소리가 만들어지는 모든 순간이 그 자체로 원본입니다. 다시 말해 시공간으로부터 초월적입니다.

turkey

또한 음악은 문화나 역사로부터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문학이나 연극, 영화 같은 경우는 책이나 영사기처럼 물질적인 객체가 아니라 작품이 내재한 내용과 의미가 중요하기에 시간에 의한 풍화를 덜 받지만,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와 문화를 반영하기 때문에 배경지식이 부족하면 작품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가 글을 쓰던 16세기 영국 사람들의 문화양식이나 생활환경 등을 알지 못한다면 이 작품의 위대성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죠. 물론 음악 중에도 문화나 종교 등의 배경지식이 있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설령 모른다고 할지라도 음악의 감상이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팝송의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도 음악을 즐기는 데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마지막으로 음악은 언어적 장벽이 없는 범세계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술문학인 시()는 시대 배경의 영향을 덜 받는 편이나, 지역이나 풍토에 국한되어 사는 동식물처럼 높은 경지에 이를수록 해당 언어의 특수성이 반영되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그 언어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라면 시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죠. 제아무리 잘 쓰인 시라고 해도 그 언어만이 구사할 수 있는 표현력을 번역으로 담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반면 음악은 (가사를 있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청취할 수 있는 소리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러한 소리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들리므로 언어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편입니다.

이렇듯 음악은 만들어진 지 오래되었을지라도, 지역·문화적 차이가 존재하더라도, 언어의 장벽이 있더라도 대체로 누구나 향유하고 즐길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위대함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 수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위대한 예술이 되기 위한 조건

이렇듯 오늘은 음악을 주재료로 삼아 위대성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그렇다면 음악에서의 위대성을 설명해줄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이 있을까요? 위대성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체계나 요소가 그 예술을 가치가 있도록 만들어내는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위대성에 다가가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할 수가 있겠습니다.

위대성을 탐구하기 위한 가장 첫 번째 요소로서 형식이 있습니다. 시에서는 운율이나 리듬감이, 문학에서는 구조와 전개 방식이, 회화에서는 구도와 균형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형식입니다. 음악도 마찬가지로 형식으로 인한 안정성과 견고성은 음악을 이루는 본질 중의 하나입니다.

그다음으로는 응축의 과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간결성과는 구분됩니다. 응축이란 이야기를 서술하고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간결한 내용 속에 의미를 부여하고 상징화하는 과정입니다. 응축의 과정은 작가의 예술성을 가다듬고 손질해나가며, 결과적으로 작가만의 내적 세계를 건설하고, 이를 외부의 세계에 전달하여 상호 소통하는 과정입니다. 제아무리 강력한 감정과 뛰어난 상상력이 있다 하더라도 응축의 과정을 거쳐서 다듬어지고 손봐지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표현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음악에 있어서 응축의 과정은 음악이 가진 에너지와 상징성을 집약적으로 표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응축과 간결성을 구분해보자

토르3 라그나로크의 한 장면 1 토르3 라그나로크의 한 장면 2
토르3 라그나로크의 한 장면

위 사진은 토르3의 빌런인 헬라의 등장 장면입니다. 토르의 강력함을 상징하던 망치(묠니르)를 한 손으로, 한 번의 일격에 부수어버립니다. 감독은 헬라가 어떠한 인물인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과거의 사건을 나열하는 대신에 이 응축된 장면을 통해 그녀의 강력함과 역할을 모두 설명해냅니다. 이에 반해 간결성은 대사나 자막 등을 통해 '그녀는 정말 강해'와 같은 방식으로 언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두 경우 모두 강력함을 설파하고자 하나 감상자에게 전달되는 의미에는 큰 차이가 발생합니다.

보편성도 위대성을 판가름하기 위한 조건 중의 하나입니다. 보편성은 예술이 시대와 문화, 역사 등을 초월하여 지속 가능한 결과물로 구현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사람들을 납득시키고 설득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예술은 스스로 소멸하기 마련입니다. 수많은 예술 작품에 사랑과 죽음에 대한 서사가 등장하는 이유도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보편성 그 자체만으로 예술성을 구축할 수는 없는데, 이에 작가로서의 독창성 또한 겸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독창성은 *선재성(先在性)과도 맞닿아있는데,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창조함으로써 예술가의 자질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독창적이라고 해서 예술성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언어로 독창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창적인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것이 아닌, 모두가 아는 기존의 언어를 이용해서 새롭고 신선한 내용을 만드는 것처럼 말이죠.

* 선재성(先在性): 시간적·심리적으로 앞서는 성질. 이 글에서는 '최초'의 맥락과 유사합니다.

이러한 선재성에는 감가상각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뛰어나고 독창적인 소재라고 할지라도 해를 거듭할수록 닳고 닳아져 그 독창적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클리셰(Cliché)라고 부르는 진부한 소재도 그것이 처음 탄생했을 시점에는 뛰어난 독창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른 예술 분야와는 달리 음악에서는 선재성이 곧 독창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데요, 착상이 낡고 옛것이라 할지라도 그 작품이 창조성이 없거나 예술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브람스의 음악이 그러하였고 말러 또한 그러한데, 선재(先在)성을 뛰어넘는 *선재(仙才)적 능력으로 예술가 자신만의 독창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예술적 아이디어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라고 할지라도 그 가치가 더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보지 못한 예술적 시도이지만 누군가는 그 음악이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느냐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 선재(仙才): 뛰어난 재주. 또는 그 재주를 가진 사람.


또한 독창성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개입되는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 둔감함과 민첩함, 보수적인 것과 진보적인 것, 혹은 이들의 혼합물은 위대성을 결정짓는 요소가 아닙니다.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적 성향이 그의 음악의 독창성에 영향을 미쳤을지는 몰라도, 동성애 자체를 예술가의 독창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즉 예술적 독창성 그 자체와 독창성을 만드는 요소는 구분해야 합니다.

또한 한 작가 평생의 모든 작품에 의한 작품 총체의 완성도가 있습니다. 예술가가 살아있던 나이만큼 그 숙련도와 성숙함을 보여줄 수도 있고, 혹은 천재성에 의해 나이와는 무관한 완성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이를 비교하기에 가장 적합한 예시인데요, 하이든의 초기 작품의 경우 그 예술적 숙련도와 완성도가 후기 작품들에 의해 떨어지는 편입니다. 때문에 초기 작품은 연주가 되는 경우가 극히 드문 편이죠. 하지만 하이든은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 오래 살면서 그의 음악성과 예술성을 고양해나감으로써 숙련도와 성숙미를 통한 위대성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경우 작품의 질이 나이와는 무관하게 대체로 균등한 편입니다. 물론 그의 후기 작품에서 몇몇 과감하고 도전적인 시도들을 찾아볼 수는 있지만, 천재성에 의해 초기 작품부터 완성도가 높은 경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예술적 성숙함과 인기가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청중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감정호소, 파토스(pathos)가 지니고 있는 힘이 지배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토벤의 8번 교향곡보다 3번, 5번 교향곡이 인기가 많고 더 많이 연주되며, 브람스 또한 3번 교향곡보다는 1번이 더 대중적 인기가 있는 편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뛰어난 완성도로 극찬받는 마더(2009)보다도 대중에겐 괴물(2006)이나 살인의 추억(2003)이 더욱 친숙하고 유명한 이유와 맞닿아있습니다.

4. 위대성을 품을 시기의 적합성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예술적 가치를 두루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모든 예술 작품이 역사에 길이 남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작품이 창조된 시기가 시대의 요구에 적절히 부합하여야만 기록되고 지속되어 영원·불멸성을 가질 수 있는 행운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타고난 시기가 중요한 이유는 예술가가 지닌 예술혼과 정신이 번성하고 발전할 수 있는 시대 배경이 적절히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대 미완성적인 배경에서 그들의 작품은 후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언어의 보편성을 갖지 못한 채 그 시대 양식 속에서만 존속하다가 소멸해버립니다. 예컨대 악보가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의 작곡가들은 희미하게나마 그들의 이름만을 기억할 뿐 예술성 자체를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눈부신 재능을 지닌 여성 작곡가 중에선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한국의 작곡가 김순남은 시대가 인정한 뛰어난 작곡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상·이념적 갈등이 극에 다다른 혼돈의 시기에 태어나는 바람에 작곡가로서의 삶을 숙청 당했습니다.

Anna Mozart Anna Mozart
안나 모차르트(좌)와 파니 멘델스존(우)은 남동생 못지않은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지나
여성에게 요구되는 시대상에 순응하여 음악가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대의 억압에 순응하는 방식만으로 예술성이 발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 저항적인 예술혼으로 예술가로서의 사명을 발하는 경우도 있죠.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는 그들의 사상과 정신을 제한하고 억누르는 시대로부터 저항했기에 더욱 빛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이렇듯 예술가는 예술성을 분출하는 방식으로 시대의 억압과 불합리성에 대항하고 거스르거나, 시대의 요구에 적절히 순응하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두 가치 중에 어느 것이 더 위대한 가치인지 우위를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그너가 베르디는 각각 이러한 성향을 대표하는 작곡가입니다. 바그너는 모두에 대항하는 위대성이라면, 베르디는 모두를 위한 위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그너는 복잡성과 합리성으로 그의 음악을 구축하고자 했다면, 베르디는 단순성을 통해 대중적으로 타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바그너, 니벨룽겐의 반지


베르디, 리골레토


하지만 대항적이든 순응적이든 간에 이 모든 것을 떠나서, 역사에 남은 예술가는 그들 각자의 언어로 우리에게 신선함을 선사해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언어로써 전달되든 간에 말입니다. 대항적이라고 일컫는 바그너의 음악도, 민중적이라는 베르디의 음악도 그 시대의 청중들에게는 모두 새로운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을 전달하는 과정의 방법론보다는 그 결과론적으로 발생한 새로움과 신선함을 통해 청중들과 역사는 기억해나가며 위대성과 불멸성을 획득합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예술가가 종교나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많이 해방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개개인의 예술적 성향을 자유롭게 표출함으로써 더욱 다양한 양상의 예술가가 등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대적 외압은 소멸되는 것은 아니고 모습과 방식을 달리하여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예시로 자본주의가 있겠습니다. 오늘날의 예술가에게는 자본주의적·대중적인 요구에 부합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각자의 예술적 사상과 표현 방식에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5. 명백한 위대성이 존재하는가

위대한 예술이 오늘날까지 이를 수 있던 다양한 조건과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인류 보편적으로 사랑 받고 그 값어치가 뛰어난 예술일지라도, 그것이 역사적으로도 가장 훌륭한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위대성에 대한 개인의 판단력은 결국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그 주관성은 외부의 영향, 예컨대 국가의 개입이나 시간의 흐름 등에 의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나치에 의해 통치되었던 2차 세계대전 직전의 독일에서는 브루크너나 바그너의 음악을 신성시했지만, 멘델스존이나 말러와 같이 유대인계 작곡가의 작품은 듣는 것조차도 금지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을 불매합니다. * 우리나라에서도 한때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빨갱이의 음악이라 하여 감상 금지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북한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던 윤이상, 미국의 이미지를 망가뜨린다는 이유로 금지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사살’ 등 많은 예술 분야에 대한 국가적 개입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들과 그들의 작품이 정치적, 국가적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편이지만 작품의 역사적 위대성을 결정짓는 과정에서 국가적 개입이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 히틀러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와 더불어 바그너 그 자신도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Masacre en Corea), 1951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Masacre en Corea), 1951

또한 음악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번역할 필요가 없지만 번역할 수도 없는 점이 약점이 됩니다.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양과 서양 등 다양한 문화권의 음악이 시대배경을 뛰어넘어 통용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과정이 소요됩니다. 우선 지역적 특성이 그러한데요, 음악이 내재한 지역·국가적 색채가 소통을 위한 방해 요소는 아니지만, 그 음악의 매력이나 가치를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뒤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쇼팽은 그의 음악에 폴란드 민족적 요소를 용해해내어 자신만의 어법으로 창조해냄으로써, 국가적 음악을 세계적인 음악으로 표현해낸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하지만 폴란드인이 아니고서는 쇼팽의 음악에서 나타나는 폴란드적인 요소를 알아채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음악은 인간이 만들기에 만드는 사람의 지역, 국가, 문화적 색채를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되어 있을 뿐이죠.

concert

또한 시간이 흘러 불가피하게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하지만 그 위대성만큼은 인정할 수 있는 거장이 있습니다. 뒤파이, 조스캥, 팔레스트리나 등의 음악은 완결성이나 기술력 등 절대적인 척도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만큼 위대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역사적, 학술적 의미만을 간직한 채 후대에 전달될 뿐 다시 되살려 보편화되지 않으며, 그럴 수조차도 없습니다. 그들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선 작품의 배경지식, 역사의식, 종교적 배경, 시대 어법 등 수많은 전제조건을 습득해야만 하므로 소수의 예술가만이 그들의 작품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간접적으로 되살아나는 과정만을 반복합니다. 이러한 거장들의 위대성은 표면적으로만 유효합니다. 예컨대 훌륭한 고전 영화는 아주 많지만 소수의 사람만이 고전 영화를 찾아봅니다. 하지만 생명력을 잃은 고전 영화라고 해서 그것의 예술성이 완전히 소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던 예술성이나 기술력이 오늘날의 영화에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되어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바흐의 음악이 재발굴 되기까지의 시간 동안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등의 음악에서 바흐의 음악이 각기 다른 방법으로 살아 숨 쉬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시간에 의해 죽은 예술은 끊임없이 다른 예술가에 의해 재창조되고 생기를 부여받으며, 결국 다시 죽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Citizen Kane

오손 웰스의 영화 시민 케인.
현대인이 보기엔 조금 뻔하고 유치할 수는 있지만
그만큼 수많은 영화가 이 영화를 모방했기 때문이다.

시간에 의한 위대성의 판단은 각 시대가 가지고 있는 친화력 또한 인식해야 합니다. 예술의 성격을 구분 짓는 잣대, 예를 들어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로적인 것 등의 예술 성향에 따라 각각의 시대가 무엇을 더 중요시하고 우선시했는지에 대한 취향의 변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의 정적인 조각상을 중세에서는 따분하고 단순하다고 생각하여 예술성을 낮게 평가했던 반면에, 르네상스에는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이상향으로 추대받았던 것처럼 각 시대가 추구하는 예술적 이상향을 통해 작품에 대한 새로운 가치판단과 기준이 형성됩니다.

또한 지속성, 불멸성이 있다고 해서 항상 위대성과 일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단순히 역사적 위대성에 의거하여 존재만 하는 경우입니다. 음악사에 기록은 되어있지만 아무도 연주하거나 듣지 않는 총렬음악이나 우연성 음악이 그러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단순히 선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은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 정도만의 의미를 지닙니다. 예술적인 값어치보다 오락적인 측면에서 불멸성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대적 유행에 따르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그러하며, 다수의 대중음악이나 뮤지컬이 상업적 속성에 더 초점을 두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6. 절대적 위대성의 부재와 위대성 통찰의 필요성

궁극적인 질문에 다시 접근해봅시다. 위대성에 대한 판단은 객관적이고 지속적이며 견고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위대성을 판가름하는 우리의 잣대가 얼마나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위의 사례를 살펴보았듯이 위대성에 대한 평가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는 변화를 거쳐 왔습니다. 때문에 영원히 통용될 수 있는 예술적 어법도, 범시대적인 예술도, 객관적 판단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즉 위대성은 각각의 시대정신에 따라 항상 새롭고 살아 숨 쉬는 감수성을 요구하며, 이를 통해 예술적 가치는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유동적으로 움직입니다.

결국 위대성의 절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으며, 위대성에 대한 가치판단 또한 항상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예술에서는 ‘영원성’이란 존재할 수 없는 가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위대성이라는 것은 소수의 합의로 결정되며, 이는 창작자와 인식자, 혹은 비평가가 위대성을 판가름하는 잣대가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 인식은 매우 불안정하고, 또 상대적입니다. 이를 거꾸로 논증해본다면 지금의 예술이 미래에서 위대성을 가질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창작자와 수용자의 상호작용이 무시된 20세기의 현대음악이 처한 현실에서 배울 점이 있듯이 말이죠. 이처럼 관심이 점차 무관심으로 수렴하여 역사 속에서 사라져가는 예술은 위대성에 문제를 제기할 필요도 없이 그 자체가 우리와 무관해지는 과정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시대에서 필요로 하는 위대성의 기준이 어떠한지 인지하고 이에 따른 본인의 강령을 확고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위대성이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오는지,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 등의 핵심을 읽어내는 과정을 통해 동시에 내가 있는 현시대를 통찰하는 과정으로의 인지적 확장이 가능할 것입니다.

참고문헌: 책 <위대한 음악가, 그 위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