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옥타브는 몇 개의 음으로 이루어질까?
피아노 건반처럼, 기타 프렛처럼 한 옥타브는 반음 간격으로 구성된 열두 음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실제로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음악들이 한 옥타브를 열두 음으로 전제하고 만들어지고 있고요. 정확히는 한 옥타브를 열두 음으로 나누는 방법 중에서도 평균율이라는 방법을 전제하고 있죠.
하지만 애초에 이 질문에는 하나의 답만이 존재하지 않아요. 한 옥타브는 두 개 음으로 이루어질 수도, 일곱 개 음으로 이루어질 수도, 백 개 음으로 이루어질 수도, 심지어는 '무한대'의 음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거든요. 440Hz의 진동수를 가진 A음과 그보다 한 옥타브 위인 880Hz의 진동수를 가진 A음 사이에는 660Hz, 770Hz, 825Hz, 852.5Hz, 866.25Hz... 등 파고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한 소리들이 진동하고 있어요.
즉 한 옥타브는 열두 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음악적 전통 안에서 사람들이 임의로 정해놓았던 틀일 뿐이죠. 그 틀을 깨고 나가면, 즉 한 옥타브를 열세 음, 스무 음, 서른 음으로 생각하고 음악을 만들면 어떤 음악이 탄생할까요? 열두 음 바깥의 음을 구하다, 미분음 신대륙을 함께 탐험합시다!
미분음(microtone, 微分音)은 음악에서 반음보다 좁은 음을 통칭하는 말이에요. 즉 의미 자체가 한 옥타브를 12음으로 나누는 것을 전제하고 있죠. 옥타브를 열두 개로 나누는 것이 보통인데, 열두 개보다 더 많이 나눈 것이 미분음이라는 뜻이니까요. 12음을 기반으로 음악 전통을 쌓아온 유럽 클래식 음악에서는 20세기 초부터 미분음에 관심을 가졌어요. 12음을 한 번 더 나누어 한 옥타브를 24음으로 구성하는 4분음음악 등이 이목을 끌었죠.
사진 출처: https://bit.ly/36gnc5H
그런데 반음보다 좁은 음 자체가 20세기에 새로이 등장한 것은 아니에요. 예를 들어 인도 음악 전통에서는 스루띠(shruti)라 하여 한 옥타브를 22개 음으로 나누었어요. 아랍 음악 전통에서는 한 옥타브를 24개 음으로 나누고 마캄(makam)이라 불리는 고유의 선법이 발달했죠. 즉 '반음보다 좁은 음' 자체는 문화권에 따라 고대부터 인지되고 음악의 재료로 사용되었어요. (미분음은 12음을 전제하는 유럽음악 중심적 어휘인 것이죠!)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Shruti (music), 위키피디아 Turkish makam
그러나 유럽-서양 문화권에서는 옥타브를 12음으로 나누는 전통이 발달하였고, 이에 따라 반음보다 좁은 음이라는 '미분음'의 개념이 20세기 초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오늘 이야기할 미분음 음악은 이처럼 유럽 음악 전통에서 파생된 것들을 주로 다룰 예정입니다. (비유럽음악 전통에서의 미분음 음악은 후속 아티클을 기대해주세요! 🤗)
앞서 미분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옥타브를 12음으로 나누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말했죠. 그렇다면 유럽인들은 왜 옥타브를 11음도 13음도 아닌 하필 12음으로 나누게 되었을까요?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피타고라스
고대 그리스에서 활동한 피타고라스(a²+b²=c²의 그 피타고라스 맞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예부터 협화음정으로 인식되던 8도, 5도, 4도 등을 간단한 수적 비율로 정리하였어요. 길이가 a인 현에서 x라는 음이 난다면 현의 길이를 1/2a로 줄였을 때 x에서 한 옥타브 높은 음이 난다, 즉 현의 길이의 비가 2:1이면 음의 높이의 비는 1:2로 옥타브 관계를 이룬다는 것이죠.
한편 현의 길이의 비가 3:2면 음의 높이의 비는 2:3으로 5도 음정이 발생하게 되는데, 피타고라스는 이 5도를 계속 쌓아올려 한 옥타브를 12음으로 조율했어요. 이를 피타고라스 음률이라고 합니다. 이후 중세 유럽에 이르러 장3도와 단3도까지 단순한 수적 비율로 표현될 수 있음을 실제와 이론 양쪽에서 모두 인정받아 협화음정에 포함되었으며, 협화음정들의 비율을 조합하여 조율하는 체계를 순정률(just intonation)이라 부르게 되었어요.
그런데 순정률에는 늑대 음정🐺이라는 치명적인 모순이 있었어요. 한 옥타브를 순정률로 조율하려면 꼭 찌그러진 음정들이 생겨났거든요. 조율을 조정하여 하나의 찌그러진 음정을 해결하면 또 하나의 찌그러진 음정이 만들어지고 말죠. 순정률의 이상에 맞추어 조율한 음정은 너무나 예쁘게 나오는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나쁜 음정을 아주 없앨 수도 없다는 것이 순정률의 단점이었어요.
늑대 음정은 수직적인 음들의 울림과 화음의 연결, 조성 음악으로 나아가던 유럽 음악인들에게 크나큰 골칫거리였어요. 늑대 음정이 포함된 화음은 울림이 찌그러지기에 곡에 사용할 수 없고, 하나의 조로 조율한 악기로는 다른 조성의 곡을 연주할 수 없었으니까요. 조성을 바꾸려면 악기도 다시 조율해야 했죠.
이에 유럽 음악인들은 가온음률 등의 과도기를 지나 옥타브 내 12음을 같은 간격으로 나눈 평균율을 개발하기에 이르러요. 순정률이 다수의 예쁜 음정들을 위해 소수의 늑대 음정을 묵인(?)하는 체제라면, 평균율의 모토는 "나쁜 음정들의 나쁨을 모든 음정들이 나눠가진다면 세상은 조금 더 살기 좋아지지 않을까?"였어요. 평균율에서는 옥타브 즉 완전8도를 제외한 모든 음정이 조금씩 찌그러져 있어요. 순정률의 예쁜 음정을 듣다가 평균율의 음정을 들으면 깜짝 놀랄 걸요?
하지만 평균율에서는 모든 음정이 찌그러진 대신 어떤 음정도 못 들어줄 만큼 엉망진창까지는 아니에요. 모든 상황 모든 경우 바람직하지는 않으나 들어줄 만은 하다- 이것이 평균율의 강점이 됩니다. 어느 조에서든 모든 음이 동일한 음정이기에, 어떤 음정으로 구성되는 어떤 화음일지라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한 곡 안에서 조성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지요. 즉 평균율이란 원리적으로 조성음악의, 조성음악에 의한, 조성음악을 위한 조율체계라 할 수 있어요.
✔ 가장 수학적인 것이 가장 음악적인 것이다, 피타고라스 음률
✔ 빛에는 그림자가 따르기 마련이지, 순정률과 늑대 음정
✔ 민주주의는 음악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졌다, 평균율
옥타브를 12음으로 나눈 이유도 알았겠다, 본격적으로 12음 바깥의 미분음 음악을 찾아 떠나볼까요? 가장 먼저 살펴볼 미분음은 반음을 한 번 더 반으로 쪼갠 반의 반음, 4분음(Quarter-tone)이에요. 즉 한 옥타브가 24음으로 구성되죠.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새로운 음악의 가능성을 찾고자 쇤베르크의 12음렬 등 여러가지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4분음 음악도 그 중 하나였어요. 클래식 음악의 범주에서 여러 작곡가들이 4분음으로 작업하였는데, 그 중 몇 가지를 들어볼까요?
🎶 Alois Hábas : Sonata for Quarter-tone Piano
20세기 초중엽에 걸쳐 활동한 작곡가 알로이스 하바(Alois Hába, 1893~1973)는 미분음을 사용한 작곡으로 유럽의 전위적인 작곡가들에게 두루 영향을 미쳤다고 해요. 재미있는 점은 그가 미분음을 탐구하게 된 계기가 민족음악과 고대음악의 탐구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합니다. 미분음 음악, 알고 보니 민족주의 음악의 계승자? 😬
🎶 Charles Ives : Three Quarter-Tone Pieces
역시 20세기 초중엽에 활동한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찰스 아이브스(Charles Ives, 1874~1954)는 프로그램 노트를 통해 이 곡에서 미분음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상세히 밝히고 있어요. 현대음악 작곡가 특유의 정교하고 명징한깐깐한 분석력으로 작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악장 Largo는 주로 온음계적이다.
4분음은 경과음이나 계류음으로 사용되며 4분음 화음은 변성화음의 확장으로서 사용된다.
다만 가운데 섹션에서는 4분음 화음의 확장이 이루어진다.
두 번째 악장 Allegro에서는 4분음 높게 조율된 피아노 부분이
두 피아노 사이의 리듬적 대비 또는 '불화'로 구성되어 있다.
순수한 4분음 화성적 관점에서 이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하략)
기껏 반음을 한 번 더 반으로 나누었을 뿐인 4분음 음악은 미분음 음악의 '순한 맛'이라 할 수 있어요(4분음? 흥, 그놈은 우리 중 최약체지!) 지금부터 소개해드릴 두 명의 작곡가는 미분음에 고춧가루 팍팍 쳐서 '매운 맛' 미분음 음악을 작업한 사람들이랍니다. 냉수 한 잔 하시고, 만나러 갑시다!
🎶 Julián Carrillo : BALBUCEOS
멕시코의 현대음악 작곡가 훌리안 까리요(Julián Carrillo, 1875~1965)는 Sonido 13(열세 번째 소리)이라는 미분음 이론을 직접 개발하여 자신의 작품에 적용하였어요. 까리요는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는데, 바이올린으로 여러가지 실험을 하면서 이 이론을 구상했다고 해요. Sonido 13 이론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한 옥타브를 96음으로 구성하는 것이에요. 그야말로 어마무시한 미분음 체계이죠.
까리요는 Sonido 13이 "12음에 갇혀 있는 서양음악 너머로 음악가들을 인도할 것"이고 "새로운 음악 세대의 출발점이 되어 모든 것을 바꿀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Sonido 13은 음악의 큰 흐름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어요. 아무래도 인간이 인지하고 분절할 수 있는 음에는 한계가 있고, 지나치게 세분화한 미분음 음악은 상상하기도, 작곡하기도, 연주하기도 어려웠을 테니까요.
🎶 Harry Partch : Chorus of Shadows
미국의 작곡가 해리 파치(Harry Partch, 1901~1974)는 한 옥타브를 배음렬에서 비롯된 비평균적(각 음계 사이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은) 43음계로 구성하는 미분음 음악을 전개했어요. 12음을 전제로 개발된 기존 서양 악기로는 완벽하게 연주되기 어려운 음악이었겠죠? 파치는 직접 자신의 43음계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개발했어요. 43음계로 구성된 건반,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조율된 기타 등... 해리 파치는 고대 음악에도 관심이 있어 고대 그리스의 발현악기인 키타라도 재창조 하였답니다.
사진 출처: harrypartch.com
그렇다면 미분음 음악은 클래식 현대음악에서 전위적으로 시도되는 클래식 음악의 하위 음악에 그치는 것인가? 그렇지 않아요. 최근에는 재즈에서 미분음이 주목받고 있답니다. 클래식 현대음악에서 미분음 음악이 '전위적인' 의미로, 조성에서 탈피하는 방법론으로 주로 사용되었다면 재즈에서는 미분음 음악을 '확장적인' 의미로, 즉 조성을 더욱 발전시키고 확대하는 방법론으로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 Jacob Collier : In the Bleak Midwinter
이 부문의 대표 주자 중 한 사람은 역시 제이콥 콜리어(Jacob Collier, 1994~ 영 앤 지니어스)입니다. 기존 화성에서의 전조 개념을 미분음에 응용하여 한 조에서 그 조의 4분음 위로 전조한다거나, 순정률과 평균율을 오가며 화음을 구성한다거나 (똑같은 화음일지라도 순정률 음정과 평균율 음정이 다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다른 빛깔의 화음이 나오겠죠?), 한 곡 내에서 기준음 A4의 튜닝을 442, 444, 448 등 자유자재로 바꾼다거나 하며 그야말로 음악에서의 혁명적 온고지신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의 음악관을 엿볼 수 있는 인터뷰 영상도 한 번 보고 가시죠! 한글 자막 有😎
한편 로우파이(Lo-Fi) 음악에서도 미분음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로우파이 음악의 출발점 자체가 '잡음이 많이 섞인' 음향적으로 깔끔하지 않은 것이다 보니 어딘가 찌그러져 있고 낯선 느낌을 주는 미분음과 잘 어우러지게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이죠. 로우파이 음악에서도 미분음은 기존의 조성적 어법 내에서 이색적인 화음의 색깔을 빚어내는 데 주로 사용됩니다.
미분음은 20세기 후반 전자음악과 신디사이저, 가상악기가 발달하면서 더욱 접근하기 용이해졌어요. 신디사이저에 미분음이 포함된 음계를 입력하고 하나하나 소리를 직접 들으며 작곡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EDM에서도 미분음이 활용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겠죠!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음악가 Sevish는 EDM에 미분음을 결합하여 독특한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있어요. 우리에게 익숙한 화성 진행을 사용하지만 사용되는 음들이 미분음이기에 조금씩 어긋나는 느낌, 비틀리는 느낌, 새로운 느낌을 선사합니다.
🎶 Sevish : Gleam
의외로 우리에게 익숙한 장르에서도 미분음이 사용되고 있죠? 이처럼 재즈, 힙합, EDM 등에서는 최근 미분음을 활용하여 음악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시도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요.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미분음이 조성의 대립항으로 이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성음악의 틀 내에서 미분음을 응용하여 새로운 빛깔의 화음, 화성, 조성을 빚어내는 것이죠. 20세기 초 조성음악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무조성의 길을 탐구한 클래식과는 대조되는 지점입니다.
오늘은 '미분음'의 개념과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현대 재즈에서는 Intonalism Harmony라 하여 조율 체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 그리고 미분음에서 비롯된 새로운 화음 구성이 시도되고 있다고 해요. 국내에는 아직 번역이 되지 않은 개념인 것 같습니다(내조성주의...? 조성안주의...?) 다음 시간에는 Intonalism Harmony를 소개하기 위해 먼저 조율의 역사를 더욱 상세히 살피겠습니다. 그 다음에 불협화를 피하려는 목적의 조율이 Intonalism Harmony에서는 어떻게 변용되어 더욱 다양한 빛깔의 화음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지 말씀드리려 해요.
그럼, 그때까지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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