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신대륙을 발견하다

K-음악의 시초, 민족음악 돌아보기

해방 이후 민족음악진영의 탄생까지

2년 전|Martin
목차
  1. 민족음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2. 만일 여러분이 1945년 서울에 살아가는 한 음악가라면
  3. 조선음악건설본부의 설립
  4. 해방 후 한국음악의 지형도
  5. 네 번째 길. 민족음악의 탄생

1. 민족음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민족음악’, 이름만 들어도 고리타분한 이 단어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온 인류가 인터넷으로 자유롭게 소통하고 서로의 문화를 마음껏 즐기는 이 시대에 ‘음악의 민족성’을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할지도 몰라요.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팝 밴드 ‘이날치’와 BTS가 세계를 휩쓰는 요즈음이야말로 ‘민족음악’의 전성시대가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네요.

이렇듯 ‘지구촌’이라는 단어마저 더 이상 신선하지 않고 ‘세계화’도 이미 다 끝난 일처럼 보이는 이 시대에 ‘민족음악’이라는 단어는 고루하게 느껴지기 쉽습니다. 인터넷에 10초만 검색해도 평생 듣고 남을 음악이 쏟아지는 시대에 민족의 정체성을 다시 강조하고 민족음악을 되돌아보자는 주장은 분명 낡고 폐쇄적인 것처럼 보이기 쉽죠. 마치 북한을 연상시키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러한 음악의 ’탈민족주의(Postnationalism)’가 밝은 면만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음악이든 ‘내가 좋아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논리는 분명 옳지만, 자칫하면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지 잘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식의 ‘시장 만능주의’로 빠질 위험 또한 분명히 남아있죠. 영향력이 적은 약소국가나 소수 민족의 음악이 소외될 수도 있죠.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예술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단순히 편안하고 유용한 놀이가 아니다. 우리는 예술에서 펼쳐지는 진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시·문학 작품을 배우며 단순히 작가의 ‘글솜씨’나 ‘필력’에만 감탄하지 않듯, 음악 작품을 통해서도 ‘작품이 쓰이던 당시의 시대상’,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등을 접하며 다면적으로 음악을 마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잊힌 민족음악의 뿌리를 되돌아봄으로써, 우리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금 되짚어보는 시도가 그저 무의미한 일로만 그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이번 콘텐츠에서는 해방 직후의 한국의 음악을 둘러싼 다양한 사건과 인물을 조명해보려 합니다. 해방 직후 한국의 상황은 어떠했으며, 그 시대를 살던 음악가들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어떤 일을 벌였는지 등등 우리에게 생소한 이야기지만 재미있으니 놓치지 말고 읽어주세요.😭😭 또한 앞으로의 한국 음악을 이끌어나갈 우리들에게도 많은 메세지를 주리라 장담합니다.

2. 만일 여러분이 1945년 서울에 살아가는 한 음악가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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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서울 광화문

만일 여러분이 1945년 서울에서 살아가는 한 음악가라면,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어쩌면 음악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을지도 몰라요. 당시 기록에 따르면 물가는 급격히 요동치고, 생필품 공급은 늘 불안정했으며, 정치적인 목적의 테러가 끊이지 않았으니까요. 이런 혼란 속에서 느긋하게 음악을 듣고 즐긴다는 것은 사치였겠죠.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만일 여러분이 밖을 돌아다니던 중 길거리 집회를 마주하게 된다면, 아래 두 노래 중 하나를 쉽게 들을 수 있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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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 작곡 '독립행진곡 (해방가)' 악보 (1946)

김성태 작곡 '독립행진곡 (해방가)'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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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남 작곡 '해방의 노래' 악보 (1945)

김순남 작곡 '해방의 노래' (1945)

어떤가요? 이 두 노래는 해방 직후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모두 1946년 출판된 최초의 음악 교과서 『임시중등음악교본』에 실렸습니다. 당시 많은 평론가들은 김순남의 '해방의 노래'를 ‘농민의 음악 감수성과 시대상을 고취시킨다’고 평가했지만, 김성태의 '독립행진곡'은 ‘일본 제국주의 군가의 음률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혹평했어요(그렇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두 곡이 음악적으로 크게 다르게 느껴지진 않네요). 음악이 어떻든 간에 1945년 이들은 모두 서울(경성)에 같이 모여 함께 문화예술단체를 세우고 이끄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듯 독립은 많은 음악가가 활동하고 자신의 꿈과 영감을 펼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의 장이 되었죠.

뒤에서도 다루겠지만 '해방의 노래'의 작곡가 김순남은 소련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했으나 정치적 이유로 북한에서 권리를 박탈당한 후 조선소의 노동자로 남은 인생을 보냈고, 반면 '독립행진곡 (해방가)'의 작곡가 김성태는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학교에서 작곡이론을 공부한 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2대 학장이 되었습니다.

시인 정지용, 화가 이쾌대, 작곡가 현제명

비록 경제적으로는 빈곤하지만 자유롭게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이 오자 많은 예술가가 의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문화계를 이끌어가던 유명 인사로는 시인 정지용, 소설가 김동리, 채만식, 화가 이쾌대, 작곡가 현제명 같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작품 활동만을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단체와 협회를 만들고, 전시회·연주회·낭독회를 개최하고, 학교를 설립하는 등 적극적으로 문화 활동을 벌입니다. 이러한 활동은 지금까지도 이른바 ‘문화예술계’의 토대 역할을 하게 되지요. 남북한 모두에서요.

3. 조선음악건설본부의 설립

해방은 왕성한 작품 창작과 문화 활동의 기폭제가 됩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해방이 된 직후부터 보이기 시작했어요. ‘8·15 광복’을 맞은 다음 날인 8월 16일, 한반도 전역의 예술 종사자가 모두 모여 전국대회를 소집하게 됩니다. 8월 18일에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라는 기구가 설립되고, 산하 조직으로 조선음악건설본부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당시 이 조직을 이끌던 사람은 시인 임화, 소설가 이태준, 작곡가 김성태 등이 있었습니다. 8월 15일 낮까지도 아무도 해방이 되리라고 예측하지 못했다는 당시 기록을 감안하면 해방된 지 불과 3일 만에 전국 각지에서 문화예술단체가 만들어져 곧바로 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그간 예술가들의 열정과 의지가 얼마나 억눌려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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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음악건설본부 중앙조직 임원

당시 설립된 조선음악건설본부의 중앙조직은 위처럼 구성되었습니다. 작곡부, 기악부, 성악부, 국악위원회가 건설되어 해방 이후 음악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이 처음으로 이루어졌죠. 그러나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만은 않았어요. 조직을 급하게 세우다 보니 많은 문제가 생겨났고, ‘빨리빨리 그러나 대충대충’의 부작용이 금방 나타나게 되었어요.

당시 조선음악건설본부의 가장 큰 이슈는 우리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두 각기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세 가지 입장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서양음악진영, 전통음악진영, 대중음악진영으로요. 이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클래식을 하든지, 국악을 하든지, 가요를 하든지 하나만 하자’가 되겠네요 (뭔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각각의 입장을 지지하는 대표 인물과 주장, 장단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4. 해방 후 한국음악의 지형도

1) 서양음악 진영 (클래식 음악)

주장
서유럽을 넘어 점차 세계의 표준이 되어가고 있는 서양음악(클래식 음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우리 음악의 미래로 삼자는 생각

서양음악은 미국과 서유럽의 막강한 자본과 문화적 영향력, 오선지로 대표되는 합리적인 기보 체계를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 막강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서양음악과 무관한 자국의 전통 음악이 여전히 많이 있었지만, 당시에도 이미 세계 표준, 가장 보편적인 음악 언어로 여겨졌죠. 그러나 갓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에는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클래식 작곡가는 지식인층 이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영향력도 적었어요. 또한, 우리 고유의 문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문화적 이질감 또한 적지 않았죠.

대표 인물 (*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
  • 작곡가 홍난파*(1941년 사망): 동요 '고향의 봄' 등 작곡
  • 작곡가 이흥렬*: 동요 '섬집 아기', 군가 '진짜 사나이' 등 작곡
  • 작곡가 현제명*: 가곡 '희망의 나라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초대 학장
작곡가 홍난파, 작곡가 이흥렬

2) 전통음악진영 (국악)

주장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으니, 다시 조선 시대의 국악을 되살려 우리 민족 음악으로 삼자는 생각

전통음악은 우리 민족 고유의 음악이라는 점에서는 어쩌면 우리 민족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가장 적합해 보이기는 했어요. 그러나 아악·당악·향악으로 대표되는 조선 시대의 궁중음악과 풍류방에서 선비들이 추구하던 음악은 일반 백성과 동떨어져 있어 서양음악만큼이나 낯설게 다가왔고, 쉽게 호응을 얻기도 어려웠죠. 또한, 그 당시에도 이미 ‘오래된 음악’이라는 인식이 강해 새 시대에 음악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으로 삼기엔 무리가 있었습니다.

대표 인물 (*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
  • 국악인 함화진*: 저서 「조선아악개요」, 「조선음악통론」등 저술
  • 작곡가, 대금 연주자 김기수*: 창작곡 '세우영' 작곡, 국립국악원 원장 역임
국악인 함화진, 작곡가, 대금 연주자 김기수

3) 대중음악진영 (가요)

주장
가장 큰 인기를 끌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대중음악(당시에는 트로트와 재즈)을 우리 음악의 기반으로 만들자는 생각.

당시나 지금이나 가요 시장은 클래식 음악 시장이나 국악 시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오갑니다. 이렇듯 대중음악은 당시 사람들에게도 가장 친숙하고 인기 있는 음악 장르였지만, 해방 후 대중음악시장을 지배하던 트로트는 일본의 엔카에서 음계나 리듬, 발성법을 모조리 가져왔기 때문에 ‘우리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는, 친일 잔재 청산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정치적 흐름과도 상반된 것이었어요.

대표 인물 (*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
  • 가수 현인*: 노래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등
  • 가수 남인수*: 노래 '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
가수 현인, 가수 남인수

위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서양음악진영, 전통음악진영, 대중음악진영 세 가지 입장 모두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었고, 끝없는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논쟁은 자기 입장의 장점을 설파하는 데에서 점차 다른 입장의 단점을 깎아내리고 비난하는 것으로 변질되기 시작했어요.

사실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클래식을 하든지, 국악을 하든지, 가요를 하든지 하나만 하자는 주장에 곧바로 단답형으로 대답하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음악가 개개인의 전공 선택 문제가 아니라 한 국가 전체의 문화 산업 방향을 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겠죠. 더군다나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고, 음악 장르 사이의 벽도 높았던 당시 음악계의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이들 간의 화합이나 교류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것이든 장단점이 극명하게 나타났고, 조선음악건설본부는 만들어지자마자 해체되며 각기 다른 세 가지 진영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학자가 지적하는 조선음악건설본부의 문제는 성향, 가치관, 생각의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사람들을 모조리 받아들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빨리 조직을 건설해야 하고, 그 조직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많은 인원이 필요했으므로 어쩌면 이런 결정은 불가피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이는 필연적으로 갈등과 다툼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지휘자, 바이올리니스트, 국악 연주자, 소리꾼, 트로트 가수, 독립운동가, 친일음악가, 친미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우리 음악의 미래’를 논하게 되었으니,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죠.

5. 네 번째 길. 민족음악의 탄생

앞서 말했듯, 조선음악건설본부의 가장 큰 이슈는 우리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고, 합의나 결론에 이르지 못한 채 세 진영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이후 서양음악진영은 음악 교과서, 음악대학 등 출판 및 교육 분야를 장악했고, 전통음악진영은 문화 행정 및 교육 기관(일부)을 장악했으며, 대중음악진영은 음반 시장과 TV·라디오 등 문화 매체를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한 ‘클래식 전공’, ‘국악 전공’, ‘실용음악 전공’이라는 구분은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죠.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흐름 모두를 거부한 젊은 음악가 그룹 역시 생겨났습니다. '해방의 노래'의 작곡가 김순남, 안기영, 리건우를 비롯한 젊은 음악가 집단들이 클래식, 국악, 가요의 장점만을 결합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들의 과제는, 보편적이면서도(서양음악의 장점), 우리 전통에 토대를 두며(국악의 장점), 사람들에게도 친숙한(대중음악의 장점) 음악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어요. 동시에 친일에 뿌리를 둔 선배 세대와의 결별을 다짐하기도 했죠. 다소 거창하기도 엉뚱하기도 한 이 시도, 바로 ‘민족음악진영’의 탄생이었어요. 민족음악진영의 대표 작곡가 김순남은 당시 발간되던 월간지 '민심'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어요.

일부의 소극적인 악인들은 양심적이라고 자칭하며 삼간방 안에 문을 걸고 현실도피에 흐르지 않았을까?
우리는 사상과 음악을, 민족과 음악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우리의 음악은 생활의 현실을 진실하게 파악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김순남의 글 ‘음악’
1945년 12월 '민심' 창간호

그들은 과연 어떻게 한국음악의 미래를 이끌어나가고자 했을까요? 2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