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탄생한 민족음악 진영, 이들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 등장하게 되었는지는 지난 1편에서 자세히 살펴보았었죠.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 클릭!)
간략하게 요약하면 해방 이후 우리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놓고 벌어진 갈등으로 인해 서양음악진영, 전통음악진영, 대중음악진영이 나누어지게 되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셋 모두를 거부함과 동시에 셋 모두의 장점만을 취하고자 한 민족음악진영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인들에게 보편적이면서도(서양음악의 장점),
우리 전통에 토대를 두며(국악의 장점),
사람들에게도 친숙한(대중음악의 장점) 음악을 만들자!
👉 민족음악의 탄생 배경
민족음악은 친일에 뿌리를 둔 선배 세대와의 결별을 다짐하기도 했죠. 민족음악 진영이 유일하게 인정한 선배 세대의 음악가는 최초의 민족음악가로 알려진 작곡가 안기영 (1900-1980)이었어요.
작곡가 안기영 (1900-1980)
민족음악진영의 작곡가들이 유일하게 인정한 선배 세대의 작곡가 안기영, 여기에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작곡가 안기영은 1900년생으로,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에 다니던 중 3·1 운동에 연루되어 퇴학을 당한 후, 유학길에 올라 미국 오리건 주의 엘리슨 화이트 음악학교(Ellison-White Conservatory)를 졸업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유학은커녕 기본적인 교육조차 받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엄청난 엘리트로 대접 받았죠. 작곡가이자 당대 최고의 테너였던 그는 곧바로 이화여전(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의 성악과 교수, 이화여전 합창단 지휘자로 부임하며 왕성한 활약을 하게 됩니다.
(좌) 테너 안기영의 캐리커처 (우) 이화여전(현 이화여자대학교)
안기영이 활동하던 당시 음악계의 동향을 살펴보면 미국 유학파였던 안기영, 홍난파, 안익태, 현제명, 일본 유학파였던 김순남, 리건우, 김성태 등의 작곡가들이 해방 전후 서양음악진영의 선두주자였고, 이들 대다수의 목표는 식민지 조선의 음악을 서양처럼 만드는 것이었어요. 대학 편제를 서양의 종합대학 방식으로 개편하고, 학교에서는 동요와 가곡, 클래식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죠. 이는 근대화를 통해 정치와 경제 체제, 교육 시스템과 문화, 생활 양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서구식으로 바꾸고자 했던 당시 지식인들의 행보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습니다(오늘날의 음악대학이 '서양'음악대학이 아닌 음악대학이라는 보통명사를 차지하고, 다른 음악은 '국'악이나 '대중'음악으로 분리해버린 것도 이때 부터죠).
그러나 안기영이 가고자 하던 길은 당시 동료 유학파 음악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가 추구하는 길은 미국에서 배운 서양음악을 바탕으로 식민지 조선의 민요와 전통음악을 재해석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서양음악진영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안기영의 가곡 '그리운 강남' (1928)
이 곡은 어떤가요? 작곡가 안기영의 가곡 '그리운 강남'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직후 발표한 작품으로, 발표된 직후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임방울의 '쑥대머리 귀신형용'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 최고의 히트곡으로 평가 받고 있죠. 당시 깊고 깊은 산골짜기 아낙네들도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대요.
그렇다면 이 곡이 왜 그토록 대단한 성공을 거뒀을까요? 이 곡의 음악적 특징은 선율은 5음음계*에 화음은 찬송가 반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유행하던 트로트나 군가와는 전혀 달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소 생소한 서양 클래식 음악이나 찬송가 같지도 않았습니다. 분명 피아노 반주로 이루어졌지만 전혀 낯설지 않고, 우리 민요지만 세련된 서양 가곡(찬송가) 반주와 아름답게 어우러진 이 음악에 당시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새롭지만 이질적이지 않은 신선함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죠.
* 5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음계. 한국 전통음악의 음계 또한 5음음계이다.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안기영이 우리 전통음악의 특징을 연구하고 이를 서양 음악의 재료로 활용한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을 수집하고 연구하였으며, 이를 서양음악 이론 체계에 적극적으로 대입하였습니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물이 그리운 강남이었던 것이죠. 이 곡으로 안기영은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한국 최초의 유학파 테너이자 민족음악가로 불리는 영예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에도 아쉬움은 있었는데요, 바로 전통 음악에는 화성 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이를 대체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안기영은 서양 음악의 화성 이론을 그대로 가져와서 활용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러한 아쉬움은 훗날 2세대 민족음악 작곡가들이 극복하고자 하는 목표가 되었죠.
안기영은 이 곡으로 단숨에 문화계의 유명 인사가 되었고, 그 영향력을 바탕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게 됩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문화 산업을 이끌던 라미라가극단 창설(1936년), 한국 최초의 가곡집 발표(1929년), 한국 최초의 뮤지컬 '견우직녀' 발표(*1937년)가 모두 그가 해낸 빛나는 성과들이죠. 또한 선율은 5음음계에 화음은 찬송가 반주라는 작곡 양식은 많은 후배 작곡가들에게 하나의 롤 모델이 됩니다. 1부에서 소개해드린 김순남의 '해방의 노래', 김성태의 '독립행진곡'도 이를 롤모델로 삼은 것이었죠.
*해당작품의 창작 시기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음악계는 수많은 친일 음악가가 활동했고, 친일 음악이 발표되었습니다. 소설 '무정'으로도 잘 알려진 당대 최고의 문인 춘원 이광수 (1892-1950)가 일본의 강제 징용을 찬미하는 '지원병장행가'의 가사를 작사하고, 홍난파가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국민가요 '희망의 아침'을 만드는가 하면, 현제명이 가담한 조선음악협회는 일본어 작문 등 시험 합격자에게만 음악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예증을 발급하기 시작했죠. 당시 조선총독부 정보과에 의해 모든 음악 활동이 감시당하던 조선에서 이 기예증 없이는 어떤 음악 활동도 불가능했으므로, 식민지 조선의 주류 음악계 전체가 이들 친일파의 통제를 받게 되죠.
음악 활동을 허가해주는 기예증
작곡가 안기영이 '그리운 강남'을 발표한 지 17년 후인 1945년, 식민지 조선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부에서 소개했듯이 이 당시 많은 음악가가 우리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놓고 격론을 벌였습니다. 작곡가 김순남(1917-1983)과 리건우(1919-1998)는 모두 도쿄제국음악학교를 졸업한 젊은 작곡가로, 선배 작곡가 안기영의 생각을 이어받아 서양음악을 바탕으로 우리 민요와 전통음악을 재해석하려는 민족음악진영에 가담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2세대 민족음악가로 불리죠.
작곡가 김순남(좌)과 리건우(우)
김순남과 리건우는 도쿄제국음악학교 시절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유학 시절 ‘일본음악콩쿠르’, ‘빅터 관현악콩쿠르’등에서 많은 상을 받았었죠. 1942년 귀국한 그들은 ‘성연회’(聲硏會)라는 지하 서클을 만들어 음악 교육과 민요 연구, 소규모 작곡 발표회를 여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 그들의 음악에서 민족음악의 영향은 거의 보이지 않았어요. 앞서 말했듯 일제 강점기라 문화 검열이 심했고, 조선 문화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이 이루어져 민족음악은 고사하고 우리말로 된 가사로 곡을 쓰는 것조차 어려웠죠.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 김순남과 리건우는 지하 서클을 통한 ‘비합법적’ 음악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당연히 이들의 작품은 기악음악이 주를 이루게 되죠. 김순남은 이를 “일본제국주의가 요구하는 일본군가나 일본국민가요운동에서 이탈하기 위한 방편”이라며 꽤나 자조적으로 회고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해방이 되고난 후, 작곡가 김순남과 리건우의 목표는 뚜렷해졌습니다. 안기영이 실패한 바로 그 지점을 돌파하려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당대 최고의 거장 안기영에게도 버거웠던 과제가 김순남에게 쉬울 리가 없었겠죠. 초기에는 안기영의 작곡 양식을 모방한 '해방의 노래'를 발표한 그는 곧이어 우리 민요와 전통음악을 뒷받침할 새로운 음계와 화성학을 만들어 서양의 화성학을 대체하고자 하는 시도에 착수합니다.
조선음악건설본부
이들은 다른 수많은 음악가와 마찬가지로 조선음악건설본부에 가담합니다. 그러나 앞서 1부에 언급한 것처럼 여러 다른 성향, 가치관, 생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화합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금방 해체되고 맙니다. 김순남과 리건우 역시 서양음악을 맹종하고 우리 전통음악을 부정하는 서양음악진영의 선배 작곡가들의 생각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그들 다수는 친일에 가담하기까지 했으니 말이죠.
결국 해방된 지 딱 한 달 후인 9월 15일, ‘서양음악진영’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요, 현제명과 김성태가 가담한 고려교향악협회와 김순남과 리건우가 가담한 조선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이 각각 탄생하게 됩니다. 고려교향악협회는 1945년 10월 18일 ‘미군 환영회’를 개최하는 반면, 조선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은 10월 11일 경성방직 파업노동자를 위한 ‘위로 음악회’를 개최하며 서로의 이념 차이를 정확히 드러내죠.
조선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에 가담한 김순남은 1945년~1947년의 기간 동안 가곡집 3권, 혁명가 50곡, 한국 최초의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 실내악 작품 50곡을 작곡하는 어마어마한 창작력을 보여줍니다. 그는 골방에서 음 하나하나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수개월에 걸쳐 한 작품을 만드는 장인정신에 입각한 작곡가가 아니었어요.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쏟아내고, 수많은 연주회를 개최하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곡을 수정하며 다음 작품 창작에 활용하는 전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단연 해방 이후 조선 음악계의 선두주자로 떠올랐어요. 그리고 그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두고 예술적 완성도를 높게 평가받은 작품은 김소월의 시를 바탕으로 쓰인 가곡 '산유화'입니다.
김순남 '산유화' (1947년)
이 작품은 발표된 즉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48년 11월 12일 서울 배재중학 강당에서 이루어진 테너 김문행 독창회에 참석한 작곡가 최영섭(1929-)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기도 했죠.
대체 무엇이 이러한 열광적인 반응을 만들었을까요? 김순남은 해방 이후 수많은 곡들을 작곡하며 거듭한 실험을 통해 ‘선율은 5음 음계에 화음은 찬송가 반주’로 대표되는 안기영의 작곡 양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음악을 발표하게 됩니다. 바로 그가 평소 연구한 ‘모더니즘 음악’의 여러 기법을 민족음악과 결합한 것이었죠. 리듬은 세마치장단과 굿거리장단의 영향을 받은 듯하나 노래는 안기영의 작품보다도 훨씬 부드러웠으며, 화성은 더욱 실험적이었습니다.
가곡 '산유화' 도입부
김순남의 '산유화'는 이러한 새로운 시도로 가득 찬 실험적인 가곡이지만 우리 전통 민요와 국악에 훨씬 더 익숙한 당시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친숙하게 들렸고, ‘제 2의 안기영’의 등장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반면 리건우의 가곡 '붉은 조수'는 훨씬 더 현대음악에 가깝습니다. 맹렬하고, 극단적으로 다양한 감정을 오고가죠.
리건우 '붉은 조수' (1948년)
이렇듯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며 안기영와 같은 성공세를 타게 된 김순남, 하지만 우리에게 그의 이름과 음악은 매우 낯설기만 한데요, 그 이후에 그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의 뒷 이야기는 3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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