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신대륙을 발견하다

K-음악의 시초, 민족음악 돌아보기 (3)

김순남과 리건우, 그들의 삶

2년 전|Martin
목차
  1. 김순남을 지키려 한 미군 대위와의 만남
  2. 북한으로 간 김순남과 리건우
  3. 김순남의 몰락과 리건우의 승승장구
  4. 김순남과 리건우 이후의 민족음악
  5. 에필로그

지난 2부에서는 민족음악의 지평을 연 안기영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뜻을 이어 받고자 한 김순남과 김성태의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오늘은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1. 김순남을 지키려 한 미군 대위와의 만남

김순남과 리건우, 이들의 짧은 인기는 1947년 8월 어처구니없게 막을 내리게 됩니다. 바로 당시 남한을 통치하던 미 군정청이 좌익총검거령을 내린 것이었죠. 그전까지만 해도 남한 지역에는 정치적 자유가 있었습니다. 자유주의의 본고장인 미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불법적인 테러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를 지지하든 공산주의를 지지하든 모든 정치적 활동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죠. 그러나 오늘날 광화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극심한 정치적 갈등이 이 시기에도 나타났고, 남한 내의 치안과 질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던 미 군정청은 이를 매우 골칫거리로 생각했죠.

farewell

좌우합단위원회 해단식 사진

결국 해방된 후 정확히 2년이 지난 1947년 8월 15일, 미 군정청은 ‘좌익총검거령’을 내려 공산주의자라면 죄를 짓든 안 짓든 모조리 잡아들이기 시작했죠. 모든 좌익 단체는 해산, 집회는 금지됩니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 중 일부는 북한으로 도망쳤고, 일부는 무장한 채 산으로 들어가서 게릴라 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일부는 체포를 피해 이집 저집을 오가며 도피 생활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진보적 음악 단체를 만들어 수많은 공연을 진두지휘한 김순남과 리건우 역시 체포 대상이 되었고, 뿔뿔이 흩어져 숨어지내게 되죠. 진보 정당인 ‘근로인민당’을 이끌던 여운형의 장례식 추도곡을 작곡해 지휘한 안기영 역시 활동을 전면 금지당하게 됩니다. 리건우는 곧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고, 김순남은 행방불명 상태였어요. 이때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미 군정청 문화참사관 일라이 헤이모위츠(Ely Haimowitz, 1920-2010)의 등장이었죠.

haimowitz

미 군정청 문화참사관 일라이 헤이모위츠(Ely Haimowitz, 1920-2010)

ROTC 출신의 육군 대위였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남한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남한에 주둔하던 미 군정청은 사실상 정부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으므로, 군대 지휘관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요했습니다. 군에 징집되기 전 줄리어드 음대를 졸업하여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했던 헤이모위츠는 그중 문화 분야의 전문가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직책이 바로 미 군정청 문화참사관이었어요. 당시 30대 중반의 젊은 대위 하나가 남한 전체의 문화 정책을 결정하는 문화부장관 정도 되는 셈이었죠.

그러나 헤이모위츠는 그런 막강한 지위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전통음악을 존중하여 시골에 나가 민요를 수집하는가 하면, ‘전국농악경연대회’를 2차례 개최하고, 1947년 한국 최초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초연하는 등 군인보다는 자유분방한 예술인에 가까운 활동을 벌였죠. 미 군정청 음악고문 현제명에 대해서는 인간적 혐오를 가진 반면, 정치적으로 정반대였던 조선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출신의 젊은 작곡가들의 곡에 심취하기도 했죠. 당시 해외에 거주하던 작곡가 안익태(1906-1965)가 그에게 감사 편지를 보낼 정도로 헤이모위츠의 이러한 행보는 파격적이었죠.

그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남한의 재능 있는 젊은 음악가를 발굴해 모교인 줄리어드 음대에 유학을 보내려는 시도였어요. 고려교향악단과 KBS 교향악단의 초대 상임 지휘자이자 서울예술고등학교의 초대 교장을 역임한 지휘자 임원식(1919-2002), 해방 후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의 교수를 역임하며 ‘서울 트리오’라는 실내악단을 만들어 활발히 활동한 피아니스트 윤기선(1921-2013)이 헤이모위츠의 추천으로 줄리어드 음대에 유학을 한 사람이었죠. 그리고 작곡가 김순남 역시 줄리어드 음대에 유학을 보내고자 한 젊은 음악가 중 하나였어요.

지휘자 임원식 (좌) 피아니스트 윤기선 (우)

헤이모위츠는 바로 행동에 나섰습니다. 당시 출판된 김순남의 악보를 모두 모아 줄리어드 음대에 보냈고, 입학 허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 지휘자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 1882-1977)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어냈어요. 줄리어드 음대는 ‘김순남을 미국으로 보내기만 하면, 학교 차원에서 그의 예술 활동을 돕겠다’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죠. 헤이모위츠는 그 답신을 갖고 도피중인, 어디 숨어있는지 알 수 없는 김순남을 찾아 서울 전역을 헤매게 되죠. 그리고 그는 미 군정청 내에 숨어있던 한 좌파 스파이를 활용하여 성북동 인근에 숨어 지내던 김순남을 찾아내게 됩니다.

헤이모위츠는 끈질기게 김순남을 미국에 보내려 노력했지만, 김순남은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버립니다. 그러고는 그에게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쐬고 싶다며 드라이브를 할 자동차를 빌려 달라고 하는데요, 김순남은 이때 잠시 빌린 미군 지프차를 타고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가버리고 맙니다. 당시 미군 장교의 차량을 검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렇게 하루아침에 김순남은 사라지고 헤이모위츠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갔어요. ‘좌익총검거령’이 내려진 지 약 1년여 지난 1948년 7월이었어요.

그렇게 북한으로 넘어간 작곡가 김순남은 엄청난 환영을 받게 됩니다. 헤이모위츠와 남한 입장에서는 대단한 손실이었지만 북한 입장에서는 그 유명한 '해방의 노래'와 '인민항쟁가'의 작곡가가 드디어 공화국의 품에 돌아온 것이니까요. 당시 부수상 및 외무상(오늘날의 국무총리 및 외교부 장관)을 지내던 북한의 2인자 박헌영(1900-1956)과 이미 깊은 친분이 있던 그는 곧바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었고,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을 맡게 되며, 평양음악대학의 작곡과 교수 및 학부장을 지내게 됩니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문화부차관, 국회의원, 음대 작곡과 학과장을 동시에 하는 셈이었죠. 박헌영의 비서 박갑동 (1919-)는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죠.

박헌영 선생도 김순남 선생을 매우 좋아하셨고,
김순남 선생 같으신 분은 우리 민족의 보배일 뿐 아니라
세계의 보배라고 하셨지.
세원이(딸)가 아버질 많이 닮았는데,
아버지는 얼굴에 재기가 배어 나왔고 타고난 천재야.

그는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북한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4막으로 이루어진 한반도 최초의 대편성 오페라 '인민유격대'도 남기고, 이순신을 소재로 한 오페라도 만들고, 해주음악전문학교를 만드는 데에 참여하기도 했죠. 작곡가 리건우는 ‘좌익총검거령’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지만, 6.25 전쟁 직후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풀려나 간신히 북한으로 넘어가게 되죠.

2. 북한으로 간 김순남과 리건우

6.25 전쟁이 터진 후, 1952년 김순남은 소련 모스크바 음악원에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원장은 작곡가 하차투리안(Aram Khachaturian, 1903-1978), 부원장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1906-1975)였어요. 동구권 최고의 음악원에 유학을 떠나게 된 그는 곧바로 재능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들은 동아시아의 이름 모를 신생 국가에서 온 김순남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어요.

조선에도 이런 음악가가 있었는가?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그는 내가 배워야 할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 아람 하차투리안

쇼스타코비치 (좌) 하차투리안 (우)

그의 지도교수였던 작곡가 하차투리안은 김순남의 합창곡 '파르티잔: 빨치산의 노래'를 직접 '조선 파르티잔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편곡해 헌정했습니다. 지도교수가 제자의 곡을 편곡해서 헌정한다니, 김순남의 입지가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겠죠? 이 곡의 한국어 가사는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피아노와 독주 악기 편성으로 연주된 이 곡에서도 자연스러운 선율과 보다 단순해진 피아노 반주가 어우러져 우울한 느낌을 냅니다. 사극 느낌이 나기도 하고요.

김순남-하차투리안 '조선 빨치산의 노래' (1951)

1953년 6.25 전쟁이 휴전으로 일단락된 후, 북한 사회는 전쟁 실패의 책임을 두고 여러 파벌로 갈려 내부 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우리가 ‘북한’하면 흔히 생각하는, 고위 정치인들이 서로 모략을 일삼아 죽이는 ‘대숙청’이 처음으로 일어나게 되죠. 그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김일성이 모든 경쟁자와 그 동지를 제거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그 불똥은 김순남을 비롯한 모스크바 유학생에게도 튀게 됩니다. 김일성을 반대했던 정치인, 그 정치인들의 가족과 동지, 그리고 그들과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었던 유학생들에게도 평양에서 보낸 소환장이 도착하게 됩니다. 김일성의 라이벌 박헌영과 깊은 친분이 있던 김순남도 소환장을 받게 됩니다.

소환장을 받은 직후, 모스크바의 수많은 유학생이 소련에 망명신청을 합니다. 그 소환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두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대사관을 통해 망명한 사람, 제3국으로 도망친 후 잠적한 사람이 속출했습니다. 그러나 소환장을 받은 김순남은 어이없는 선택을 합니다. 평양으로 귀국하기로 결심한 거죠. 모두 말렸지만 그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김순남은 ‘설마’ 정치인도 군인도 아닌 일개 음악가를 죽이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김순남이 북한에서 꽤 유명하기는 했지만, 그는 김일성의 라이벌이 될 수도, 정적이 될 수도 없는 인물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귀국한 직후, 예상과 달리 김순남은 곧바로 체포되고 맙니다. 김일성은 그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무자비하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인물이었죠.

3. 김순남의 몰락과 리건우의 승승장구

귀국 후 체포되어 법정에 선 그는 당연히 죽음을 예견했습니다. 믿고 따르던 정치적 리더 박헌영, ‘박헌영의 오른팔’로 불리던 리승엽(1905-1954), 절친한 시인 임화(1908-1953), 헤이모위츠와의 만남을 주선한 미 군정청의 스파이 시인 설정식(1912-1953)이 모두 사형 당했거든요. 그러나 김순남은 놀랍게도 사형을 피하게 됩니다. 그가 만든 '인민항쟁가'가 여전히 북한의 애국가로 사용되고 있었거든요. 아무리 무자비한 김일성이라도, 북한의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을 죽이기란 껄끄러웠나 봅니다. 그를 처형할 수도,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던 김일성은 김순남의 모든 권리를 박탈한 후 1958년 함경남도 신포의 조선소 주물공으로 보내버립니다. 당시 북한 최고의 음악 평론가 리히림(1920-1981)이 김순남에 대해 남긴 말은 음악적으로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코미디’였지만, 그를 음악계에서 내쫓기 위한 명분으로는 충분했죠.

베토벤에서 보듯
6도 비약이 바로 부르주아가 즐겨 쓰는 방법인데,
김순남의 작품이 이처럼
6도 이상의 비약을 그린다.

조선 최고의 작곡가로 손꼽히던 그의 말미가 참으로 허무하고도 허탈한 끝을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쫓겨난 뒤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에 새로 취임한 사람은 놀랍게도 김순남의 동지 작곡가 리건우였습니다. 김순남과 거의 동일한 삶의 궤적을 보인 그가 어떻게 숙청을 피하게 되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어요. 김순남을 배신했을 수도 있고, 김일성과 친분 관계가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김순남 만큼 유명하지 않아 숙청을 피했을 수도 있죠.

이후 리건우는 김순남과는 반대로 매우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이후 1974년 황해북도예술단 작곡가로 활동하는가 하면, 1990년에는 윤이상음악연구소 명예연구사로 평양에서 개최된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서울전통예술단 안내자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1998년 그가 사망한 후 1999년 평양 윤이상음악당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리건우 음악회'가 열리기도 했어요.

작곡가 안기영은 6.25 전쟁 이후 소식이 끊겼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전쟁 중에 사망했으리라고 짐작했어요. 당시 문화계 유명인사였던 그가 북한으로 갔다면, 환영받든 숙청당하든 대대적인 보도가 있으리라고 예측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는 전쟁 중 살아서 북한으로 넘어갔고, 환영받지도 숙청당하지도 않은 채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평양음악대학 성악과 교수이자 국립예술극장 작곡가로 활동한 것을 보면 북한에서도 꽤나 괜찮은 대우를 받은 것 같기는 합니다. 대표작 '그리운 강남'이 오늘날까지도 김일성의 애창곡으로 꼽혀 자주 연주되는 것을 보면 정치적 탄압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아요.

그렇다면 조선소 노동자가 된 김순남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숙청이 완전히 마무리되고 김일성이 경쟁자를 모두 제거한 후인 1960년대, 김순남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지고 그는 몇 개의 작품을 더 남기게 됩니다. 관현악과 합창을 위한 '남녘의 원한을 잊지 말아라' (1964),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이중주 '이른 봄' (1966) 등이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이에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이중주 '이른 봄' (1966)

이 작품은 김순남의 후기 작품으로 초·중기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현대음악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많은 평론가는 당에 의해 문화예술이 심각하게 통제되는 북한에서 김순남의 실험 정신이 전혀 발휘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지요. 이 작품은 북한에서 꽤나 괜찮은 반응을 얻었지만, 과거의 영광을 다시 되찾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창작활동을 이어나가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결핵에 걸린 그는 1960년대 말부터 투병 생활을 이어나가다 1983년 사망하게 됩니다.

4. 김순남과 리건우 이후의 민족음악

안기영과 김순남, 리건우. 이 세 작곡가는 모두 민족음악가서양음악을 바탕으로 식민지 조선의 민요와 전통음악을 재해석하는 작업에 인생을 바쳤습니다. 셋 다 유학파로 북한을 택했고, 정치적 격변에 의해 그들의 삶은 이리저리 흔들렸습니다. 안기영은 전쟁 이후에도 작곡가로 활동했지만, 문화 검열로 인해 젊은 시절의 가곡 '그리운 강남', 뮤지컬 '견우직녀'와 같은 걸작들을 더 이상 만들어내지 못했죠. 김순남은 정치적 탄압에 연루되어 오랜 노동자 생활을 거쳐야 했고, 이후 잠깐 복권되었지만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리건우는 정치적으로는 승승장구했지만, 그의 후반기 삶 대부분은 젊은 시절의 ‘모더니즘 작곡가’와는 전혀 동떨어진 ‘문화예술계 고위 당 간부’의 행적으로 채워져 있죠.

반면 남한에서는 공산주의를 택한 이들 작곡가의 흔적이 철저히 지워졌습니다. 이들의 모든 작품은 금지되었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들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되었죠. 이는 해방 후 북한을 택한 많은 정치가, 지식인, 시인과 화가, 음악가의 공통된 운명이었습니다. 당시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평가받았던 안기영의 이름도 우리에게는 너무나 생소하죠. 그의 작품 중 우리가 쉽게 들을 수 있는 곡은 아마 그가 이화여전 재직 시절 작곡한 '이화여자대학교 교가'(1930) 밖에는 없을 겁니다. 김순남과 리건우 역시 전혀 알려져 있지 않죠.

그러나 간접적으로 이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훗날 남한 음악계를 지탱해나가는 뿌리 역할을 합니다. 김순남의 제자로는 후에 ‘화성학’ 책의 저자로 더 잘 알려진 작곡가 백병동(1936-), 김희조(1920-2001), 장일남(1932-2006)이 있죠. 백병동은 김순남의 작품론으로 평가받는 ‘조선가곡의 위치’를 읽고 감명을 받았으며, ‘김순남 가곡집’을 연구하며 새로운 기법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리건우의 제자로는 작곡가 변훈(1926-2000), 비디오 아트 예술가 백남준(1932-2006) 등이 있습니다. 백남준은 스승 리건우를 통해 쇤베르크 작품을 접한 후 큰 충격을 받기도 했죠. 백남준은 훗날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작곡가는 많이 나오지 않는다.
한 나라에서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한다.
핀란드에서는 시벨리우스 한 명,
헝가리에서는 바르토크 한 명이 나왔다.
한국에서는 김순남이 나오려다 말고 죽었다.

작곡가 백병동 (좌) 작곡가 김희조 (가운데) 비디오 아트 예술가 백남준 (우)

5. 에필로그

약 80년 전, 서양음악을 토대로 우리 전통음악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자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양음악을 그저 비판 없이 수용하는 것, 국악을 단순히 보존하고 지켜나가는 것 모두를 반대했어요. 그들은 서양음악진영, 전통음악진영, 대중음악진영에게 모두 무시당했습니다. 이들의 활동이 매우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김순남과 리건우의 친구이자 그들을 평생 지지한 음악평론가 박용구(1914-2016)가 얼마 전까지 살아있었고, 작곡가 백병동을 비롯한 그들의 제자가 여전히 활동하는 것을 보면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80여 년이 지났고, 오늘날 우리는 전통음악보다 서양음악이 훨씬 더 익숙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문화의 국경이 해체되고, 더 이상 기존의 장르로 정의될 수 없는 다양한 음악의 등장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죠. 그 결과물은 늘 새롭게 여겨지지만, ‘과거의 낡은 전통을 새로운 음악의 토대’로 삼고자 한 시도는 결코 낯설지 않을 겁니다. 안기영과 김순남, 그리고 리건우를 생각하면요.

참고 문헌